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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

[세계정치론] 국제관계의 역사 - 현대 총력전

by trulyforyou 202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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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관계의 역사 - 현대 총력전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승전국에게 제1차 세계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책임 문제가 되었다. 승전국들은 독일에 전쟁 책임이 있음을 베르사유에서 최종 합의문에 명시함으로써 일차적으로 배상금 요구를 정당화했다. 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둘러싼 역사학자들의 논쟁을 정치, 군사, 체계 수준의 요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각각의 동맹과 군사적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서 그 책임 소재가 분산되어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서독 여 사학자 프리츠 피셔는 1967년에 발간된 "독일의 목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좀 더 영향력 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전쟁 책임이 독일의 침략에 있으며, 그 침략은 독재 엘리트 내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주장했다.

전쟁의 복합적이고 논쟁적인 원인을 되돌아본다면, 전쟁 가담국의 동기를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다. 대다수 교전국들은 민족주의적 신조와 애국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다. 전쟁터를 향해 진군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쟁은 짧은 기간 안에 승리로 끝날 것이며, 많은 경우 영광스러운 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유럽 전장의 현실은 참호전의 등장으로 기대와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비록 1918년 11월 무렵에 실시된 연합국의 공격이 결국 전투를 종식시킬 수 있을 만큼 급진전했지만, 자동소총으로 상징되는 방어적 군사 기술은 소모전의 전술과 전략을 압도했다. 전쟁은 사회와 경제 전체가 동원된 총력전이었다. 남성은 군대에 징발되었고, 여성은 공장에 고용되었다. 비록 일본이 1914년에 영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하는 등 갈등이 세계 각지로 번졌지만, 전투의 승부처는 여전히 유럽 서부 및 동부 전선이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1917년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지도 아래 미국이 전쟁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윌슨 대통령은 자신의 국제사회관을 담은 14개 조항을 천명했고, 이를 바탕으로 1919년 파리 강화회의의 의제를 주도했다. 러시아(소련)는 1917년에 차르가 전복되고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전쟁 철수를 위한 협상에 나섰다. 독일은 더 이상 2개 전선에서 싸울 필요가 없었지만, 곧 미국의 자원이 동원되면서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독일은 1918년에 서부 전선에서 대규모 군사 공격에 실패하고 영국의 해상봉쇄가 효과를 발휘함에 따라 휴전에 동의했다.

베르사유 평화조약은 유럽 안보의 새로운 틀과 새로운 국제 질서를 약속했다. 하지만 두 가지 가운데 어느 목표도 달성되지 못했다. 승전국들은 대독일정책과 국제 질서를 통치하는 원칙에서 의견 차이를 보였다. 베르사유 조약은 1870년 이후 유럽 안보의 관건이었던 독일의 통일과 좌절 문제를 다루는 데 실패했고, 새로운 국가 창설과 논란 많은 국경 획정을 통해 독일의 실지 회복 운동을 촉진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1914~1945년 기간을 30년 전쟁으로 표현했고, 다른 사람들은 1919~1939년 사이를 20년의 위기로 묘사했다. 경제적 요인 역시 결정적이었다. 1929년에 월스트리트의 주가 폭락으로 촉발된 대공황은 많은 지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약화시켰고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정당들의 호소력을 강화시켰다. 이 가운데 독일 사회에 미친 영향이 특히 중요했다. 근대화된 모든 국가들이 대량 실업으로 고통 받고 있었지만,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극심했다.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은 나치당에 대한 지지가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독일의 국가 변환이 시작되었다. 히틀러의 야심이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었는지, 그가 어떻게 기회를 포착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테일러는 1961년에 낸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에서 히틀러가 여타 독일 정치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점은 나치즘이라는 특정 정치 철학과 인종적 우월성 및 제국주의적 팽창 이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벌였던 히틀러와의 협상 노력은 1983년 뮌헨 협정으로 절정에 다다랐다.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 영토 요구는 평화의 대가로서 용인되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토를 수중에 넣었고, 폴란드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화정책에 관한 논쟁은 히틀러에 대적할 군사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협상 이외의 다른 현실적 대안이 있었느냐에 초점을 맞춰왔다.

1939년 무렵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방어적 군사 기술을 대신하여 장갑 전투와 공군력이 등장했고, 독일은 전격전을 통해 폴란드와 유럽 서부에서 신속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히틀러는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지원하기 위해 발칸 지역에 개입했고, 이어 북아프리카에도 끼어들었다. 1941년 6월에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전투의 규모와 히틀러의 목표 범위가 분명해졌다. 초기에 대규모 승리를 거두었던 동부 전선은 겨울이 되자 교착 상태에 빠졌고, 소련은 인민과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나치의 인종 우월주의는 독일이 민간인과 소련군 전쟁 포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드러났고, 결국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 갔다. 1942년에 내려진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관한 결정 이후 독일의 반유대주의와 집단 수용소 설립은 새로운 추진력을 얻었다. 나치는 유대인과 집시 같은 소수민족의 집단 학살을 시도했고, 이로부터 홀로코스트라는 용어가 20세기 정치학 사전에 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