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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치론

[세계정치론] 제국의 종말

by trulyforyou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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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종말


2. 프랑스

프랑스의 탈식민지화는 영국과는 대조적이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외국에 점령당했으며, 프랑스의 역대 정부는 제국의 지위를 유지함으로써 자국의 국제적 위신을 보존하려고 했다. 1945년 이후 인도차이나에서 식민 통치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오랜 게릴라전과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혁명 세력, 그러니까 베트민에 군사적 패배를 당한 뒤에야 이 지역에서 철수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상황은 달랐다. 변화의 바람이 프랑스령 아프리카 지역에도 불고 있었고, 드골 대통령이 이끄는 프랑스는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제국주의 정책을 포기했다. 그러나 알제리에서는 떠나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이다. 1945년부터 1962년까지의 전쟁 결과 사망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고, 프랑스는 내전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3. 유산과 결과 : 민족주의 또는 공산주의?

한때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지구적 질서의 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자결 원칙은 더디게 이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념적, 경우에 따라서는 군사적 동원을 필요로 했다. 이처럼 아프리카의 탈식민지 유형은 다양했는데, 이는 식민지 종주국의 태도와 현지 민족주의 또는 혁명운동의 본질, 어떤 경우에는 냉전의 주역을 포함한 외부 국가의 개입을 반영했다. 많은 경우 부족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요인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제국주의 세력이 어떻게 부족 간 분열을 야기하거나 악화시켰는지는 신생 독립국가들의 정치적 안정을 고찰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점은 이 신생 국가들의 정치 지도자들이 정치적 문제와 빈곤, 저개발 같은 심각한 경제적 문제들을 다루는 데 얼마나 유능했는가이다. 아시아에서는 민족주의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이 하나의 강력한 힘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영국은 공산주의 반란 운동(1948~1960)에 승리했다. 인도차이나(1946~1954)에서 프랑스는 그러지 못했다. 베트남 입장에서 보면 수 세기 동안 중국, 일본, 프랑스 같은 외세의 압제가 새로운 적국인 미국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초기에는 유럽 제국주의에 대한 지원을 주저했지만 점차 은밀한 약속으로 이어졌고, 1965년부터 신생 국가인 남베트남에 공개적으로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지도자들은 한 국가가 공산화되면 이웃 나라도 공산화 위험에 빠진다는 도미노 이론을 언급했다. 여기에 중국과 소련의 베트남 지원은 냉전의 첨가제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제한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과적인 정치적 전략을 구사하는 데 실패했다. 일단 승리가 불가능해지자 미국은 명예로운 평화를 명분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하려고 했다. 1968년에 벌어졌던 베트콩 게릴라들의 이른바 구정 공세가 분수령이었으며, 이로써 미국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군의 완전 철수는 남베트남이 함락되기 2년 전인 1973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탈식민지의 세계적 추세는 비록 현지 상황으로 인해 자주 상쇄되기는 했지만, 20세기의 핵심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잦아들자 다른 형태의 지배와 패권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패권 개념은 초강대국의 행태, 특히 동유럽에서 소련의 패권과 중미에서 미국의 패권을 비판하는 데 사용되었다.



* 요점정리
-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유럽의 4개 제국, 그러니까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이 붕괴했다.
- 1945년 이후 유럽 국가들은 탈식민지화에 대해 각기 다른 태도를 보였다. 영국 같은 일부 국가는 떠나기로 결정한 반면, 다른 국가들은 식민지의 일부 또는 전체에서 제국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
- 유럽 국가들은 다른 지역과 국가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는데, 예를 들어 영국은 1945년 이후 아프리카 지역보다 아시아 지역에서 훨씬 더 신속하게 철수했다.
- 탈식민지화 과정은 많은 경우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알제리, 말레이시아, 앙골라에서는 혁명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규모와 격렬성은 식민지 종주국과 민족주의 운동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 독립/민족 해방 투쟁은 베트남의 예처럼 초강대국(또는 그 동맹국)이 개입하면서 냉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성공적인 탈식민지화 여부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 유럽 국가나 독립운동, 또는 민족 그 자체 가운데 어느 시각을 채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 냉전

1945년 이후 미국이 세계 강국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국제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세계정치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고, 지구 전역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서구 역사학지들은 미소 전시협력관계의 붕괴 책임이 양국 가운데 어느 쪽에 있었는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여 왔다. 전후 소련의 세계 강국 부상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소련 정부와 동유럽 동맹국 중화인민공화국 및 제3세계 혁명 세력 사이의 관계는 미소 양국 문제의 핵심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중대한 국제 정치사안이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냉전의 기원을 1917년에 일어났던 러시아 혁명에서 찾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에 초점을 둔다. 냉전이 불가피했는지, 실수나 오인의 결과였는지, 용감한 서방 지도자들이 소비에트의 사악하고 공격적인 의도에 반응한 결과인지는 냉전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논쟁에서 중심적인 질문들이다. 이후의 논쟁은 서방의 문서와 자료를 토대로 이루어졌고, 서구식 가정과 인식을 반영한다. 냉전 종식과 함께 소련의 동기와 이해에 관한 더 많은 증거들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