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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치론

[세계정치론] 냉전

by trulyforyou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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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

1945~1953년 : 냉전의 시작

유럽에서 냉전의 시작은 전시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된 원칙을 실행하지 못한 결과였다. 독일과 폴란드 같은 다양한 중부 및 동부 유럽 국가들의 미래는 점차 이전의 전시 동맹국 간 긴장을 고조시키는 문제가 되었다. 민족자결 원칙과 국가 안보를 조화시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숙제였다. 서방은 소련의 동유럽 정책이 안보에 대한 역사적 관심사가 아닌 이데올로기적 팽창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는 느낌을 점점 강하게 받았다. 1947년 3월에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의 야심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수사와 미국이 소련의 팽창 때문에 위협받는 국가들을 지원할 것이라는 선언을 통해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원조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트루먼 독트린과 이에 관련된 봉쇄정책은 미국의 자아상을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것으로 표현했고, 유럽의 경제 회복을 위해 1947년 6월에 발표되어, 이후 서유럽의 경제 재건에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한 마셜 플랜으로써 지탱되었다. 동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그 밖의 반공산주의 세력은 소련에 충성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약화되거나 제거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유고슬라비아였는데, 유고슬라비아의 마르크스주의 지도자 티토는 소련에 대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이후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는 '제3세계' 비동맹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냉전의 첫 번째 주요 대결은 1948년에 베를린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독일의 이전 수도인 베를린은 소련 점령 지역의 심장부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스탈린은 1948년 6월에 도로나 철도 같은 교통수단을 단절함으로써 소련의 지위를 강화시키려고 했다. 서베를린의 주민들과 정치적 자율성은 대규모 공수 작전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탈린은 1949년 5월에 베를린 봉쇄를 해제했다. 베를린 위기 뒤에 미국은 공식적으로 핵 능력을 갖추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 핵무기로 무장하지는 않은 장거리 폭격기를 영국에 배치했다. 1949년 4월에 조인된 북대서양조약기구 조약에 나타난 정치적 공약에 뒤이어 미군이 배치되었다. 이 조약의 핵심 조항, 즉 어느 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조항은 국제연합헌장 제51조의 집단적 자위 원칙에 부합했다. 사실 NATO의 초석은 서유럽을 방어하겠다는 미국의 공약이었다. 이는 실제로 미국이 소련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소련에 대한 ‘정치적 포위'는 군사적 위협, 특히 핵 위협의 증가를 수반했다,

냉전의 기원은 유럽에 있었지만, 아시아 및 기타 지역에서의 사건과 충돌 역시 결정적이었다. 30년 동안 벌어졌던 중국 내전은 1949년에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건은 아시아 문제는 물론이고 소련과 미국의 인식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50년 6월에 일어났던 북한의 남한 공격은 일반적인 공산주의 전략의 일부이자 미국의 결심 및 국제연합의 침략 격퇴 의지에 대한 시험대였다. 미국과 국제연합의 참여에 뒤이어 1950년 10월에 중국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3년 동안 지속되었고, 전쟁 이전의 국경이 회복되기 전까지 3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남한과 북한은 냉전 종식 이후에도 외견상 항구적인 적대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냉전이 중동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는 것은 더 어려운 문제이다. 1948년에 이루어진 이스라엘 건국은 나치의 대학살 유산과 영국 식민정책의 실패에서 기인했다. 1945년 직후 수년 동안의 복잡다단한 정치, 외교, 무력 충돌은 미소간 이데올로기적 또는 지정학적 갈등의 시각에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다. 비록 1950년대의 소련 외교정책은 아랍 민족주의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 양국은 이전 아랍 영토에 유대인 국가가 창설되는 것을 도왔다. 이집트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나세르가 표방한 범아랍주의는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띠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힘에 의거해 만들어졌고, 그 생존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적대국에 대한 지속적인 자기방어 능력에 달려 있었다. 이스라엘은 영국과 프랑스와의 관계를 발전시켰고, 그 관계는 1956년 이집트 공격에 관한 비밀 합의를 통해 절정에 달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스라엘과 미국은 더욱 결정적인 관계 진전을 이루어 사실상의 전략적 동맹이 탄생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미국은 역사적 · 전략적 · 경제적 이해를 바탕으로 아랍 국가들과 복합적인 관계를 발전시켰다.


1953~1969년 : 갈등, 대결, 그리고 타협

한국전쟁의 결과 가운데 하나는 서유럽에서 미국 군사력이 증강되었다는 점이었다. 그 목적은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침략이 유럽에서의 실제 의도를 감추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공산주의가 모스크바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단일한 정치 단위체라는 생각은 영국이나 그 밖의 다른 나라들이 공유하지 않는, 미국만의 고정관념이 되었다. 그런데도 서유럽은 군사적 안전을 미국에 의존했고, 유럽에서 냉전적인 대결이 고착화되면서 이러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1954년에 서독의 재무장은 이듬해에 바르샤바 조약의 탄생을 촉진했다. 군사력 증강이 속도를 더해 감에 따라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의 양이 유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소련이 미국을 공격할 수 있을 정도의 핵 능력을 보유하게 되자 함부르크를 구하기 위해 시카고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감수할 것인지 의문시되었고, 따라서 확장 억제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더 나아가 NATO 전략도 유럽을 위해서 전쟁 참여뿐만 아니라 핵전쟁의 개전도 무릅쓰겠다는 미국의 자발적 의지에만 계속 의존하면서 신뢰성 문제가 악화되었다. 1960년대에 서유럽 지역에만 약 7,000개의 핵무기가 있었다. NATO는 소련 재래식 무기의 우위를 상쇄하기 위해 핵무기를 배치했다. 반면에 소련의 유럽 ‘전역 핵무기'는 미국의 전반적인 핵 우위를 무력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