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전
데탕트의 부침
소련의 제3세계 혁명운동 지원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자신감과 제3세계가 사회주의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을 반영한 행동이었다. 이는 서방 진영 및 중국과의 이념 경쟁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소련의 제3세계 혁명운동 지원을 소련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증거로 여겼다. 일부 미국 사람들은 1975년에 소련이 에티오피아 혁명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데탕트의 종말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1978년에 앙골라에서 소련이 했던 역할을 인용한다. 더구나 소련이 군축 협정들을 이용해 군사적 이점을 확보하려 한다는 인식도 제3세계에서 소련이 보인 행태와 연결되었다. 이는 소련의 군사적 우위가 영향력 증가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전략무기제한협정은 소련에게 복수개별탄두를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미국의 주요 군사 시설을 위협했다. 이 영향으로 미국은 ‘취약성의 창'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랑트의 범위와 목적, 그리고 핵 억제의 본질에 대해 미국과는 다른 가정에 입각해 있었던 소련의 시각은 달랐다. 다른 사건들 역시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1979년에 이란의 샤가 전복되면서 비록 뒤를 이은 호전적인 이슬람 정권이 두 초강대국에게 적대적이었지만, 서방 진영은 이 지역에서 중요한 동맹을 상실하게 되었다.
1979년 12월은 동서 관계의 전환점이었다. NATO는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심각한 불균형 상태가 완화되지 않을 경우 유럽에 지상 발사 순항미사일과 퍼싱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합의했다. 같은 달 말에 소련 군대는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여 혁명운동을 지원했다. 소련의 행동은 서방 진영과 '제3세계'에서 맹렬한 비난을 받았고, 곧 소련은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에서의 미국에 비유하는 지루한 유혈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카터 대통령의 소련에 대한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공화당은 카터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점점 외교, 국방정책을 활용했다. 외국에서 미국이 약화되고 있다는 인식이 국내 정치에 스며들었고, 1980년에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군비 통제, 제3세계 분쟁, 동서 관계 전반과 관련하여 소련에 대해 좀 더 대결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1979~1986년 : ‘제2차 냉전’
서방에서 데탕트와 군비 통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소련이 핵 우위를 확보해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이 핵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정책과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980년에 레이건이 당선됨으로써 미소 관계는 분수령을 맞았다. 레이건이 넘겨받은 문제들 가운데 동서 관계의 붕괴로 더욱 부각된 한 가지 쟁점은 유럽의 핵미사일이었다. 전략적 변화와 유럽의 핵 균형 변화는 확장 억제에 대한 새로운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NATO가 소련 영토를 타격할 수 있는 지상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하자 NATO와 소련 간의 긴장과 NATO 안의 정치적 마찰이 점차 고조되었다. 비록 레이건 대통령이 주도하는 주요 군비정책이 선임자인 카터 대통령의 정책과 일관되어 있었는데도 레이건 대통령이 했던 무분별한 공개 발언은 그가 핵 문제에서 위험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잘 모르고 있다는 인식을 강화시켰다. 군비 통제 같은 경우 레이건 대통령은 협정 자체를 위한 현상 동결 합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소련과 미국의 협상단은 장거리 및 중거리 무기에 대한 협상에서 진전을 거둘 수 없었다. 특이한 생각 하나가 군비 통제와 미국의 동맹국 및 적성국에 대한 관계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곧 ‘스타워즈’라고 명명된 ‘전략방위구상(SDI)’은 탄도미사일에 대한 우주 기반 방어의 실현 가능성을 탐구하는 연구 프로그램이었다. 소련은 SDI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레이건 대통령의 실제 목적이 1950년대의 핵 독점을 되찾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도 SDI가 핵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라는 특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SDI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는 기술 진보는 현실화되지 않았으며, 결국 이 연구 프로그램은 축소되어 관심 대상에서 멀어졌다.
초강대국 간 긴장과 대결의 시기는 제2차 냉전이라고 이름 붙여졌고, 1946년에서 1953년 사이의 대결과 긴장 시기가 비교되었다. 서유럽과 소련에는 핵전쟁에 대한 실제적인 공포가 존재했다. 이러한 공포의 많은 부분은 레이건 행정부의 수사와 정책에 대한 반응이었다. 미국의 핵무기에 관한 성명들과 1983년 그레나다, 1986년 리비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새로운 호전성의 징표로 간주되었다. 레이건의 중앙아메리카 정책과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 지원은 미국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인 논쟁거리였다. 1986년에 국제사법재판소는 CIA가 니카라과 항구들을 비밀리에 공격한 일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하면서 미국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레이건 행정부의 군사력 사용은 제한적이었다. 다시 말해, 말과 인식은 현실과 일치되지 않았다. 1983년의 레바논에서의 경험 같은 몇몇 군사작전은 치욕적인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일부 소련 지도자들은 레이건 행정부의 말을 심각하게 생각했고, 미국이 선제 핵공격을 계획하지는 않는지 불안해했다는 증거가 있다. 1983년에 소련 공군은 소련 영공에 들어온 남한 민간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미국이 핵미사일을 유럽에 즉각적으로 배치하는 대응을 함으로써 동서 관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또 1983년 11월에 소련 정보 당국은 NATO의 연습 훈련을 오해하여 NATO가 소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1983년에 세계가 심각한 핵 대결에 어느 정도로 근접했는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최근 소련 측 자료들은 이 시기의 우발적인 핵전쟁 위험이 심각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1980년대 초까지 소련은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같은 노쇠한 정치 지도자의 승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이들의 열악한 건강 상태는 미국의 도전과 위협에 소련이 대응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급반전되었다. 고르바초프의 '신사고' 외교정책과 국내적 개혁 조치들은 소련의 외교관계와 소련 사회 내부의 일종의 혁명을 가져왔다. 국내적으로는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민족주의 세력과 고르바초프 자신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파괴하게 될 세력들에 대한 속박을 풀어줬다.
'세계정치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정치론] 균형 없는 세계 속의 미국 (0) | 2022.11.01 |
---|---|
[세계정치론] 냉전의 종식 (0) | 2022.10.23 |
[세계정치론] 냉전 - 갈등, 대결, 그리고 타협 (0) | 2022.10.12 |
[세계정치론] 냉전 (0) | 2022.10.11 |
[세계정치론] 제국의 종말 (0) | 2022.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