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국제사회의 출현 1
오늘날의 국제사회는 국가가 독립적인(또는 주권을 보유한) 행위자로서 모든 비국가 행위자들에 대해 법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린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논리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결론들 가운데 첫 번째는 모든 국가는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체제는 위계적, 패권적, 혹은 제국적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결은 외부 세력이 국내 문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외부 세력에게 개입 권한을 부여함은 묵시적으로 다른 행위자에게 우월한 권위를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에 기초한 국제사회의 세 가지 중심적인 제도들은 이 핵심적인 속성들에서 도출되어 나온다. 첫째, 외교관들은 국가들 사이의 공식적인 의사소통을 책임지는데, 이들은 주권국가의 수장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주재 국가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다. 둘째, 국가는 자발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이상 국제법으로 인정되는 규칙들에 구속받지 않는다. 셋째, 국제관계에서 질서 유지 임무는 국내 사회에서처럼 적절한 강제력을 보유한 상위 권력에 위임될 수 없다. 어느 한 국가의 힘이 우세해지지 않게 막으려는 국가들 사이의 투쟁 또는 그러한 투쟁에서 유래하는 세력균형을 통해서만 국제관계의 질서는 유지될 수 있다. 18세기가 되면 세력균형은 국제관계에서 우연히 출현하는 것이 아닌 국제사회의 근본적인 제도로, 심지어는 국제법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유럽 국제사회의 구성 요인들이 그 최종적인 형태를 갖추는 데에는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근대 국가가 출현한 것이다. 근대 국가 형성은 애초에는 교황이나 지방의 유력자들에 대해 국왕이 왕권 강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왕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과 오스만 제국이 가해 오는 위협 같은 사태들을 겪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수단들이 점차 세련되어 갔다. 이러한 수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앙 집중화되고 효율적인 군사력이었다. 하지만 그 밖에도 세 가지 중요한 수단들이 등장했다. 첫째, 전문화된 외교 인력. 둘째, 세력균형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 셋째, 군주들 사이에 체결되고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계약에서 정식 '법률' 지위를 갖는 국가들 사이에서 합의되는 계약으로 진화하는 데 성공한 국제조약.
이러한 발전 과정은 수 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 걸쳐 매우 불규칙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시기 구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잔티움 제국은 외교와 정보 수집 능력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기술들을 습득했고, 13세기 무렵에는 외교와 관련된 공식 규칙들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또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동태를 더욱 긴밀하게 감시할 목적으로 상주 대사제를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세력균형 유지에 몰두했고, 그 결과 그들 사이에 전쟁이 빈번하게 발발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국제관계에 관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였고 상주 대사관, 외교 면제, 그 밖의 외교특권에
관한 규칙들이 정식으로 유럽 국제사회의 일부분이 되었다. 또한 14세기 이탈리아에서는 '군주는 그의 왕국에서 황제의 권한을 갖는다'고 간주한다는 주권 원칙의 핵심 교의에 관한 주장이 개진되기도 했다.
15세기 말에 중세 이후 유럽 국제사회의 모습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세 가지 새로운 상황들이 등장했다. 첫째, 프랑스나 합스부르크 제국 같은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둘째,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가 누렸던 우월한 지위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고, 그 결과 국가들이 주권 원칙을 더 효과적으로 주장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마지막으로, 1492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고 그에 이어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최단 경로를 발견한(이 발견은 이슬람 국가들을 거쳐 인도로 가는 매우 위험한 경로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일은 유럽 국제관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새로운 공간 의식이 출현하고 지도 제작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영토와 엄격하게 구분된 경계선이 지닌 중요성 역시 증가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이 국제사회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인이 더 고려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요인은 유럽에서의 권력투쟁이다. 유럽은 16세기 이후부터 갈등 관계의 최종적인 해결책과 비슷한 방안에 도달하기까지 450여 년에 걸쳐 폭력적인 전쟁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세계 다른 지역들이 식민화를 거치면서, 또 20세기에 일어난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탈식민화 과정을 거치면서 유럽 국가들의 분쟁에 얽혀감에 따라 역사는 점차 지역적인 차원이 아닌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하지만 주권국가라는 균일한 정치적, 법적 실체로의 수렴은 유럽에서, 그리고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멈출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둘째, 주권국가들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질서 유지 수단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신대륙과 새로운 향로가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국제법에 대한 관심이 증대했고, 또 발견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여러 다양한 권한과 책임을 더욱 명확하게 정의할 목적으로 고안된 조약에 국제법을 적용시키는 문제에 대한 관심 역시 증가했다. 이와 함께 세력균형이 패권국의 등장을 저지할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정되면서 그 작동 원리에 익숙해지는 것이 통치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몇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이러한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들은 더욱 정교하게 향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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