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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

[세계정치론] 근대 국제사회의 출현 2

by trulyforyou 2022.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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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국제사회의 출현 2

16세기에 가장 중요한 국제법에 관한 저작을 쓴 사람들은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1480~1546)를 비롯한 스페인의 법학자들이었다. 특히 비토리아는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원주민들이 법적 권리를 가지는지와 같은 매우 민감한 이슈를 다루었다. 전통적인 가톨릭 이론에 따르면 이 원주민들은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고 간주되었다. 비토리아는 정복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식민화 정책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인디언들 역시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자연법 아래에서 일정한 법적 권리를 지닌다는 취지의 반론을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제기했다. 그러한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비토리아는 정당한 권위가 나오는 원천을 교황에서 새롭게 출현하는 주권 국가로 이전시키는 데 일조했다. 최근 들어 이러한 주장은 당시 인디언들과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힘의 불균형을 고려했을 때 주권 원칙을 제국주의적인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국제법에 관한 이후의 저작들은 주권국가들이 서로에 대해 지는 권리와 의무, 주권국가를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국제사회의 본질, 이 국제사회 안에서 세력균형의 역할 같은 논제들을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외교, 조약, 상업 교류, 해양법, 가장 중요하게는 전쟁 같은 문제와 관련된 특정한 규칙들을 제정했다. 이러한 저작들, 특히 로티우스와 바텔의 저작들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19세기 중국과 일본 정부는 무역을 할 권리 같은 법적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유럽 사람들의 압력에 직면하여 이들의 저작을 면밀히 검토하기도 했다.

 30년 전쟁(1618~1648)은 유럽의 마지막 종교 전쟁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단순히 권력투쟁의 일환으로 치러진 전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권위를 둘러싸고 몇몇 다른 경쟁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이기도 했다. 교황도 물론 이 경쟁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하지만 교황을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 가운데 한 집단인 합스부르크 제국은 왕조적 패권을 지향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전통적인 종교적 이슈보다는 다수의 독일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는 데 더 큰 관심을 쏟았다. 이 독일 국가들은 황제에 맞서서 주권적 독립 원칙을 수호하고자 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벌인 독립운동은 1568년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이단이라는 이유로 모든 거주민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촉발되었는데, 이들이 벌인 투쟁은 민족성 원리에 기초하여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30년 전쟁을 종식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의 체결을 근대적인 국제관계의 출현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한다. 이 평화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는 독일 국가들은 독자적인 외교 권한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 또한 이 독일 국가들은 ‘정확하고 호혜적인 평등'을 누린다고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는데, 이는 상당수 국가들에게 주권적 평등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였다.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국가들의 사회 관념을 포용했다. 조약 서명국들은 이제 교황이 아닌 자신들이 지배자들과 국가들에 정당성을 부여할 권한을 가진다고 선언했고, 또 국내적으로는 종교적 관용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페인 계승 전쟁(1701~1714)을 끝내기 위해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1713)에서는 '힘의 정당한 균형’이 ‘상호 간의 우의와 지속적으로 화목한 관계를 위한 최선의 기초’라고 선언함으로써 세력 균형 원칙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648년부터 1776년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지난 두 세기에 걸쳐 그 형태를 갖추어 온 국제사회가 최종적인 결실을 보게 된다. 전쟁은 여전히 빈번하게 발발했지만, 30년 전쟁에서 볼 수 있었던 이념적인 대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점진적인 쇠퇴의 길로 접어든 반면, 영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들의 국력은 급속하게 부상했다. 수백 개에 달하는 소국들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10여 개 정도 되는 주요 행위자가 유럽 국제관계의 주요 흐름을 결정지었다. 끊임없는 변화와 수많은 전쟁이 있었는데도 1716년의 드 칼리에르에서부터 1809년의 헤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유럽 학자들은 유럽이 일종의 ‘공화국'을 형성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종교적, 문화적 유사성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어떤 경우에도 자국의 자유를 보
존하려는 국가들의 단호한 결의, 국가들 간 독립성의 상호 인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력균형 원칙의 수용이었다. 외교와 국제법은, 특히 국제법은 국가의 명시적인 동의에 기초하는 경우 국제사회의 두 가지 핵심적인 제도로 간주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18세기 국제사회에 관한 이러한 해석을 논박하기도 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역사학자인 알베르 소렐 같은 사람들은 18세기 기독교 공화국의 관념을 황당한 추상이라고 폄하하면서 무자비한 자기 이익 추구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원칙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유럽 국제사회의 존재를 진심으로 확신하던 에드먼드 버크 같은 사람들은 1772년에 일어났던 폴란드 분할에 경악하면서 이를 ‘조약과 동맹, 공통된 이익과 공공의 신념'에 기초한 체제에서 홉스적인 자연 상태로 이행하는 첫 단계로 이해했다. 더 최근에 스티븐 크래스너는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주권은 국가의 무제한적인 자기 이익 추구를 은폐하기 위해 마련된 법적인 허구 또는 '조직된 위선'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들은 국제사회에 관한 이상주의적인 해석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 결국 국제사회의 진정한 기초는 그 구성원들의 자기 이익 추구에 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