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흥망
1919년 이후 집단 안보를 위한 국제적 노력은 국제연맹을 통해 추구되었다. 그러나 미국 상원은 자국의 연맹 참여를 거부했고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 1935년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침공, 1936~1939년 독일의 스페인 내전 개입에 대한 국제적 대응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일본은 1868년에 수 세기 동안의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산업화, 군사적 현대화에 이어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했다. 1937년에는 이미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에 휩싸인 중국을 침략했다. 그러나 일본의 야욕은 유럽 제국과 미국 이익의 희생 없이는 실현될 수 없었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유럽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정책을 점차적으로 추진했고, 강력했던 고립주의 정서에 반대했다. 1941년 무렵에 독일 잠수함과 미국 전함들은 사실상의 전쟁 상태에 있었다. 미국이 일본에 경제 제재를 가함으로써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 함대에 기습 공격을 할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동맹국 일본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면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태평양 무대보다 유럽을 우선시하기로 결정했다. 연합국들은 영국과 합동으로 독일 도시들에 전략 폭격을 감행한 뒤에 그동안 소련이 주장해 왔던 프랑스에서의 '제2전선'을 개시했다.
1945년 5월 독일의 패배는 원자폭탄이 미처 준비되기 전에 나왔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같은 일본 도시의 파괴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민간인 공격에 대한 도덕적 반대를 차치하고서라도 왜 폭탄이 투하되었는지에 대해 특히 미국 역사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엘퍼로비츠는 1965년에 쓴 "원자력 외교"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이 패배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실제 동기는 소련을 압박함으로써 전후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역사가들의 격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후에 진행된 연구들은 더 많은 역사적 증거를 활용하고 있지만, 트루먼 대통령이 단순히 전쟁을 끝내고자 원자폭탄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전후 처리 과정에서 소련을 압박하려는 목적 같은 다른 요인이 작용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 요점정리
- 제1차 세계대전 원인론의 초점은 전쟁의 책임이 독일 정부에 있느냐 혹은 더욱 복합적인 체계적 요인에 있느냐를 규정하는 데 맞춰져 있다.
- 파리 평화조약은 유럽 안보의 핵심 문제를 다루는 데 실패했으며, 유럽의 국제 체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불만과 불안정을 만들어 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강력하게 지지한 민족자결원칙은 유럽 식민 제국까지 적용되지 않았다.
- 히틀러의 부상은 유럽 정치 지도자들의 능력과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도전을 제기했다.
- 독일이 소련을 공격함으로써 전쟁의 범위와 야만성이 확대되었다. 초기의 단기적이고 제한된 범위의 전쟁에서 총체적인 승리를 위한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야만적 대결로 변모했다.
-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미국이 유럽 전선에 가담했고, 독일은 결국 또다시 두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 1945년에 원자폭탄이 꼭 사용되어야 했는지, 또 이 일이 냉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제국의 종말
20세기 제국의 붕괴는 세계정치의 근본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국제 문제의 조정자로서 유럽의 중요성이 줄어든 결과이자 원인이었다. 민족자결이 국제정치의 지도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와 가치의 변환을 의미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들은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1945년 이후에 제국주의는 불명예 내지 오명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비록 때로는 식민지의 독립이 느리고 지루한 무력 충돌로 얼룩졌다고 하더라도 식민주의와 국제연합헌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점차 인식되었다. 냉전은 흔히 독립 이행 과정을 복잡하게 하고 방해했다. 식민지 종주국의 태도, 반제국주의 세력의 이데올로기와 전략, 외세의 역할 같은 다양한 요인들이 탈식민지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정치 · 경제 · 군사적 요인들이 권력 이양 과정에서 여러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따라 제국주의 국가들과 신생 독립국가들은 서로 다른 탈제국주의 경험을 갖게 되었다.
1. 영국
1945년에 대영제국은 지구 전체에 뻗어 있었다. 이 가운데 49개 영토가 1947년에서 1980년 사이에 독립을 얻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대영제국 '왕관의 보석 인도의 독립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의 탄생을 예고했다. 비록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이 공동체 간의 인종 청소와 수만 명의 사망자를 초래했지만 말이다. 영국 정부는 탈식민화의 흐름에 소극적이었으므로, 인도 독립은 전후 초기의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제국 종말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나타났다. 이는 해럴드 맥밀런 수상이 1960년 2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아프리카 대륙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예고한 데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케냐(1952~1956)와 말레이시아(1948~1960)에서 일어났던 토착 혁명 세력과의 충돌을 제외하고, 영국의 아프리카 철수는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로디지아/짐바브웨에서 '1인 1표'와 다수 흑인 통치로의 이행은 소수 백인들이 영국 정부와 세계 여론을 무시함으로써 난관에 부닥쳤다. 님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이 백인들을 지원하고 선동했다. 1948년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차별정책 아래 대내적 제국주의 형식을 띠었으며, 나미비아 점령에서는 보다 전통적인 제국주의적 관행을 실시했다. 리스본의 군사독재가 전보되어 아프리카와 마지막 유럽 제국(포르투갈)이 붕괴한 이후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탈식민지/냉전 투쟁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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