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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

[세계정치론] 기독교와 이슬람 질서

by trulyforyou 2022.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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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와 이슬람 질서

로마는 기원후 395년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된 이후에도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비잔티움 제국으로 알려진 동로마 제국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에 두고 이슬람 세력의 끊임없는 압박을 견디어 가면서 1453년까지 존속했다. 그리스 정교의 본산지이기도 한 비잔티움 제국은 매우 효과적인 정보망을 구축했고, 적들의 분열을 교묘하게 선동했으며, 또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 조직되고 훈련된 외교 인력을 운용함으로써 이슬람 세력에 미치지 못하는 군사적인 약세를 만회하는 데 성공했다.

서로마 지역에서는 교황이 로마 제국의 초국가적인 권위를 계승하여 중세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한을 주장했다. 교황에게 주어진 역할은 ‘권력’ 이 아닌 '권위’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개념화되었으며, 세속 지배자들은 교황이 내린 칙령을 자주 무시하곤 했다. 그런데도 가톨릭교회는 중세 유럽의 국제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통합의 끈을 제공했다. 기독교의 매우 포괄적인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은 국제관계에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교회는 이슬람교도를 비롯한 이교도와의 교류를 금지했다. 실제로는 교황이 내린 칙령이나 이와 비슷한 이슬람교 율법만으로는 이교도와의 상업 거래나 동맹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위반 사실을 정당화 해야 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칙령과 율법의 존재를 적절하게 고려해야만 했다. 종교적인 원칙들을 보완하기 위해 교회는 일련의 제재 체계와 중재 절차, 공식적인 법률 심리, 그리고 교회법이라고 알려진 수많은 특정 규칙들을 포괄하는 매우 정교한 법률 체계를 마련했다. 또한 외교관의 안전 통행권에 관한 규칙들과 조약의 다양한 측면들에 관한 규칙들, 예를 들면 조약 위반에 대한 제재에 관한 규칙과 조약이 폐기 될 수 있는 근거에 관한 규칙을 제정하기도 했다. 교회가 가진 가장 중요한 제재 수단은 파문이었지만, 그 밖에도 벌금 부과라든가 공개 참회처럼 덜 가혹한 처벌도 존재했다. 이러한 구조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은 마틴 와이트가 '대규모 국제 관료 한 사제집단이었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전쟁의 시작과 실제 수행, 종결에서 준수해야 할 규범에 관한 ‘정전론'을 정식화하는 데 앞장서 왔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체계적인 논의로 남아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아퀴나스를 비롯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고민한 문제는 기독교를 적들의 공세에서 지켜 내는데 필수적인 전쟁을 '다른 쪽 뺨도 내주어라.' 같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대한 문제였다. 이 사상가들은 이처럼 어려운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다음과 같은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찾으려 했다.

• 전쟁은 정당한 이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전쟁을 하는 목적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 적법한 권위를 지닌 사람만이 선전포고를 할 수 있다.
• 전쟁을 함으로써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상당한 경우에만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 정당한 의도를 지니고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조건들이 완벽하게 충족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들은 국제적인 담론의 일부분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전쟁 참상을 감소시킬 목적으로 하는 국제적인 합의를 도출하려는 이후의 시도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 있었던 또 하나의 주요 종교인 이슬람교 역시 국제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선 무함마드가 632년에 사망한 이후 아랍 세력은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지역으로 매우 극적이고도 신속하게 팽창했고, 그 결과 로마 기독교와 그리스정교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둘째, 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모든 이슬람교도들은 교인으로서 단일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니고 움마 또는 교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며 , 이러한 정체성은 부족, 인종, 국가 같은 다른 모든 정체성에 우선한다고 간주되었다. 이슬람 초기에는 이러한 움마가 지닌 이상이 칼리프라는 제도를 통해서 어느 정도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분열과 지역 유력자들의 세력 확대 같은 요인들 때문에 정치 제도로서의 칼리프 체제는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는데, 이때 유목 민족이던 투르크족이 이슬람교로 개종함에 따라 이슬람의 정치 질서는 새로운 추동력을 얻게 되었다. 투르크족은 오스만 제국(1299~1922)을 건설했고, 이 제국은 그 전성기에는 남유럽의 상당 부분과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을 지배했다. 오스만 제국은 1683년에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 단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패배 이후 점차 쇠퇴하게 된다.

초기 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세계는 다르 알-하르브(전쟁 영역)와 다르 알-이슬람(이슬람 영역)으로 구분되었다. 두 영역 사이에는 최대 10년까지 지속될 수 있는 휴전 기간을 제외하고는 항구적인 전쟁 상태가 계속된다고 간주되었다. 이론적으로 모든 이슬람교도들은 다르 알-하르브가 이슬람을 받이들일 때까지 지하드(마음과 말과 손과 칼을 이용한 투쟁이라는 뜻)를 계속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유일한 예외는 ‘성서의 백성들 유대인들을 주로 가리키는데, 실용적인 이유에서 다른 종교들까지 흔히 포함하기도 했다)로서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은 인두세를 납부해야 했고, 이슬람교도들에 비해서 누릴 수 있는 혜택 역시 제한적이었다. 이 두 영역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휴전 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모든 이슬람교도는 이 휴전 조약을 엄격하게 준수해야 했다. 사실 이슬람교는 기독교보다 조약 준수 의무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또한 이슬람교는 전쟁 중에 여러 가지 윤리 원칙 준수를 강조했다. 물론 이러한 원칙들은 기독교의 정당한 전쟁에 대한 관념과 마찬가지로 빈번하게 위반되었지만, 원칙 준수를 위해 노력한 군사 지도자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