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사회의 관념
서로 구분되는 정치 공동체 간 관계의 전반적인 구조와 패턴을 특징짓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쪽 극단에서는 전쟁과 정복, 전쟁에서 패한 사람들에 대한 학살과 노예화가 공동체 간 접촉의 유일한 형태로 남아 있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끝없는 투쟁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쪽 극단에서는 각 사회가 언어와 문화, 종교 같은 특징에 따라 구분되고 정치적, 종교적 독립은 미합중국에서 각 주들이 누리는 만큼만 누리는 사회로 구성된 세계정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등장한 다양한 양태의 상호작용을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느슨하거나 견고하게 조직된, 중앙 집중화된 또는 덜 중앙 집중화된, 상대적으로 공식적인 또는 비공식적인 형태의 제국들에서부터 개별 단위체들의 독립성 또는 그들의 주권에 기초해 구성된 국제체제에 이르는 상호작용의 양태들이 포함되어 있고, 이들 사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국제적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넓은 의미에서 국제사회라는 용어는 공통된 규칙과 실천의 지배를 받는 모든 종류의 상호작용 양식에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특정한 역사적인 담론과 이 역사적인 담론으로부터 부분적으로 도출된 이론적인 관점에 협소하게 적용되어 왔다. 이 담론은 복잡한 중세 질서에서 주권과 불개입을 핵심 원칙으로 하는 유럽 국가 체제의 출현에 관한 것이다. 이에 관한 설명들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은 ‘국가들의 가족' 또는 ‘국제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연합을 구성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주권적 지위를 보호하고자 국가들이 내린 결정에 기초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연합에 속한 국가들을 다른 외부 행위자들과 구분시켜 주는 ‘일련의 가치들' 또는 ‘문명 표준'에 기초했다. 이 연합 안에서 국가들 간 관계는 주권 평등 원칙과 불개입, 국제법 규칙들을 통해 규율된다. 이 단체 밖에 있는 국가들인 경우 ‘야만'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런 국가들에 대해서는 서구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주로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불평등 조약'에서부터 노골적인 식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통제와 지배 수단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험에 바탕을 둔 이론적 관점은 국제사회 접근법 또는 국제정치학의 영국학파로 알려져 있다. 헤들리 불은 이 접근법에 관한 가장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한 바 있다. 그의 출발점은 국가들이 자신들보다 상위 권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들은 국제적인 무정부상태(정부의 부재) 안에 존재한다는 데 있다. 권력투쟁이 불가피함을 강조하면서 이는 오직 세력균형을 통해서만 완화될 수 있다고 본 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불은 국제사회가 존재함으로써 잠재적으로 도출되는 세계정치 질서의 존재를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존재한 모든 국제사회는 언어적, 윤리적, 종교적, 예술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공통된 문화를 보유했는데, 이 문화를 통해 공동의 규칙과 제도가 등장하는 데에 필수적인 의사소통과 상호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국학파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좀 더 오래된 역사적 담론은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식민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기독교적 국제사회 관념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이러한 관념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와 그 밖의 지역에서 토착민들에게 땅을 빼앗는 데 체계적으로 이용되었다. 마찬가지로 '문명 표준'의 관념 역시 19세기 제국주의 활동과 중국이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불평등한 대우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국제 공동체 같은 용어의 사용은 강대국들의 지배라는 변하지 않은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데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국제사회의 전통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은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를 통해 국제사회를 좀 더 미묘하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이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세계정치에 대한 통찰력 역시 상당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국가들과 국제정치 행위자들 간 메커니즘은 그러한 상호작용의 큰 맥락을 이해함으로써만 온전하게 설명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맥락을 개념화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각각의 방식은 독특한 관점과 연구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세계경제구조를 강조하는 연구는 사건을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한다. 국가들 간 상대적인 힘의 균형을 강조하는 연구는 세력균형을 통해 어느 한 강대국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게 막으려는 끊임없는 투쟁이라는 측면에서 국제정치를 설명한다. 세계사를 서로 다른 이념구조의 충돌로 이해하는 사람은 진보를 근대성과 그에 대한 반발이 충돌되는 필연적인 변증법의 일부분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역사상 중요한 변환은 뿌리 깊은 경제적, 권력 정치적, 문화적 요인으로 촉발되어 온 반면, 국제정치 행위자들 간 관계의 형태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규칙과 규범, 제도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언제나 인간 행위자였다. 본질적으로 '국제사회’ 라는 용어는 그러한 규범과 규칙 ,제도로 구성되는 구조 전체에 대한 간략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제사회는 단순히 유럽의 발명품이라기보다는 세계사를 통틀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요점정리
- 국제사회는 공통된 가치와 규칙, 제도를 인정하는 서로 구분되는 정치 공동체들의 모임으로 정의될 수 있다.
- 국제사회는 '영국학파'의 중심적인 개념이다.
- 국제사회라는 용어는 원래는 유럽 국가들 간 관계를 가리키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었지만, 서로 구분되는 정치 공동체들 사이의 다양한 정치적 협정에도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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