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 옐친에서 푸틴과 메드베데프로
냉전의 종식 이후 서구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탈 공산화된 러시아와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나가느냐에 대해서였다. 러시아는 마르크스주의의 계획경제에 기초한 초강대국에서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시장경제 국가로 변모한 1991년 이후 여러 시련을 겪었다. 가장 낙관적인 유럽 사람들조차 75년여 동안 동일한 체제를 유지했던 국가가 이러한 일을 겪어내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특히 1990년대는 러시아가 경제적, 이념적 자산이 감소하여 더 이상 미국에게 강력히 도전하는 국가가 아니라 쇠퇴하는 국가로 변한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경제적 보상도 많지 않았다. 오히려 급하게 서구식 사유화를 채택한 결과 러시아는 1930년대 대공황 같은 혼란을 겪었는데, 산업 생산이 급감하고 생활 수준이 추락했으며, 냉전 시대 때 군사물자 생산에 전념하던 지역은 완전히 몰락했다. 반면에 옐친 대통령이 편 외교정책은 러시아 사람들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예전 자본주의 적들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가 러시아를 서방에 팔아먹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정책이 러시아 밖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러시아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가 마치 고르바초프처럼 모든 것을 양보하고 거의 아무런 대가도 받아 내지 못하는 듯해 보였다.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상당수의 민족주의자들과 옛 공산주의자들은 특히 강력하게 옐친을 비판했다. 그들에 의하면 옐친과 그의 관료들은 최저 가격에 러시아의 자산을 새로운 소수 지배 세력에게 불하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서방에 종속되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요약하자면 옐친은 러시아의 국가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옐친 대통령의 후계자인 푸틴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러시아에 대한 분명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그가 취임 이후 상당히 다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국내에서 민족주의를 강화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이익과 서방의 이익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 행위였으며. 러시아의 경제와 엄청난 양의 천연자원이 새로운 부유층이나 그들의 서방 친구들이 아니라 국가의 목적에 기여하게 했다. 또한 푸틴 대통령은 민주주의 개념을 재정의했고. 여기에다가 러시아적이거나 주권적인 성격을 명백하게 불어넣었다. 이는 외형상으로는 온전한 민주주의의 모양새를 띠고 있었지만 독립된 의회와 자유로운 매체에 대한 평등한 접근에서는 내용상 점차 부실해져 갔다. 푸틴 대통령이나 그의 후계자 메드베데프 모두 분리를 원하는 체첸 지역에 잔인한 정책을 펴고 인권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명백하게 무관심을 보여서 서구 우방을 많이 만들지 못했다.
이러한 러시아 내부의 변화는 서구에서 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미국 사람들과 유럽 사람들은 처음에는 현실주의적인 가정으로 이를 못 본 체했다. 경제적 이유(무역이 증가하고 있었다)와 유럽과의 지리적 근접성, 그리고 러시아가 결국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자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사실 때문에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이 계속해서 펴는 정책들의 영향력은 러시아와 서구의 관계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종합해보면, 어떤 사람들이 당시에 매우 느슨한 개념으로 말했던 제2차 냉전을 서구 사람들이 초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사태가 의미하는 바는 서구가 몇 년 전에 바랬듯이 러시아를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로 부드럽게 체제를 이행해 가는 과정의 ‘전략적 동반자’로 여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냉전 시대와 비교해서 서방이 걱정할 점들이 더 많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소련과 똑같은 지리적 독립체가 아니었다. 그동안의 경제개혁은 러시아를 서구 시장에 의존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념적으로도 새로운 러시아는 지구적 경쟁자가 아니었다. 이렇게 서구는 러시아에 대해 걱정할 문제들이 많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러시아 사람들은 서구가 러시아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고 러시아가 서구를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 뒷마당으로 여겨 왔던 곳에 경제적, 전략적 관계를 확장하려는 서구와 미국의 교묘한 술책 때문에 러시아는 발트 3국 1990년대에 서구에게 '잃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이제 우크라이나나 그루지야를 잃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이 상황에 관해서 타협이란 없을 것이었다. 향후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조정된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경제적 압력을 더욱 강하게 행사했다. 그루지야에 대해서는 특히 친미, 친 NATO 성향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 당선 이후 더욱 강경한 정책을 썼다. 2006년에는 관계가 긴장되었고, 2007년에는 극도로 나빠졌으며, 2008년에는 완전히 위험해졌다. 그해 8월에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고려할 때 갈등의 결과는 이미 예측할 수 있었다. 전쟁이 서구와 미국의 의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설도 똑같이 예측 가능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책임이 없지는 않지만) 작은 그루지야를 상대로 러시아가 벌이는 침략 전쟁을 민주적 서구와 권위주의적 러시아 사이에서 긴 경쟁이 시작됨을 알리는 선호로 간주했다.
따라서 소련이 해체되고 약 20년 뒤, 그리고 옐친 대통령이 자리에서 떠난 지 십몇 년 뒤를 바라보는 전망은 암울해 보였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에 취임했을 때 미국-러시아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이다. 또한 핵무기 확산 통제처럼 두 나라가 계속 공동 목적을 추구하는 영역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고 좋은 외교술과 달래기를 해도 이미 잃어버린 신뢰를 완전히 복구시킬 수는 없었다. 문제 있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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