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형 없는 세계 속의 미국
냉전 시대가 근본적으로 다른 기준에 따라 운영되는 대립된 사회 · 경제 체제 사이의 첨예하고 분명한 대립으로 특징지어진다면 탈냉전 질서는 더 통합된 세계 경제에서 국가들이 하나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질서로 쉽게 규정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질서를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용어는 지구화인데, 이는 1989년 이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국제 관계의 새로운 체제를 정의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새로운 체제에서는 국경을 넘나드는 엄청난 활동량 때문에 시장이 국가보다 더욱 중요하게 되고 국경과 경계는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권이 붕괴하고 이전에 닫혀있었던 계획경제가 개방되면서 나타난 결과물은 지구화 외에도 있다. 권력 분배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변화는 누군가에게는 경쟁자를 물리친 미국의 승리로 보였던 현상 즉 새로운 '단극' 세계 체제의 출현이었다.
주지하듯이 이는 냉전 종식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1970년대와 1980년대에 몇몇 학자들은 실제로 미국이 하락세에 있다고 믿었다). 또한 학자들은 처음에 1989년 냉전 종식의 결과로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건이 점차 진행되면서(특히 미국이 이라크에서 대승을 거두고 소련이 1991년에 붕괴하면서) 신세계 질서는 미국이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질서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 더욱이 1990년대 들어 경성 · 연성 권력의 모든 주요 지표들이 밝혀지면서 그 모든 지표들이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는 듯해 보였다. 이는 국제적으로 서 있는 지구적 행위자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세기말에는 미국이 단순한 초강대국에서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위베르 베드린이 1998년에 언급했듯이 초초강대국으로 변화했다는 관점이 유행했다.
새로운 국면은 중요한 일련의 질문들을 제기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러한 힘의 우위가 실제로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쉬운 대답은 없었다. 항상 그렇듯이 대부분의 현실주의자는 다른 강대국들이 미국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조만간 부상하게 됨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학자들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미국이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미국의 패권이 21세기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논쟁은 단극 체제 아래에서 미국의 힘이 어떻게 사용될지에 관한 두 번째 논쟁을 불러왔다. 일반적으로 미국 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 절제하는 것이 좋으며, 미국의 힘을 국제제도 속에서 조화시키는 방식이 지구 패권 운용의 가장 효과적이고 수용 가능한 방식이라고 조언했다.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스스로 자제하는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과거에도 항상 권력을 현명하게 사용했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미국이 권력을 현명하게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정 기간 동안(특히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대부분의 미국 대외 정책 결정자들은 자제하는 성향을 띠었다. 실제로 강대국으로서의 이점이 있었으면서도 1990년대에 미국이 특별히 심각한 목적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는 데 매달린 흔적은 찾기 힘들다. 비평가들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지구화를 촉진하는 일 말고 미국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알기 어려웠다고 한다. 미국은 거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미국 학자들이 '포토맥 강 위의 로마'에 대해 흥분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탈냉전 시대에 외국에서 위험한 작전 수행을 함으로써 미국의 생명과 재산을 낭비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힘에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또는 힘을 사용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는 듯해 보이기도 했다.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는 국제체제를 더 안전하게, 미국을 더 강하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미국을 싸우기 싫어하는 전사로 만들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1990년대 미국은 임무가 없는 초강대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요점정리
- 세력균형 관점에서 볼 때 소련 붕괴에 이은 냉전의 종식은 국제 체제에서 미국의 비중을 극대화했다.
- 2000년까지의 보편적 인식은 미국이 단순한 '초강대국' 이라기보다는 '초초강대국'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 소련과 공산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던 '명백하고 실재하는 위험'이 소멸되자 미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그들의 힘을 행사하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 냉전 종식 이후의 미국은 임무가 없는 초강대국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 유럽 : 작업 진행 중
미국에게 탈냉전기가 가져온 가장 커다란 문제가 자국 이익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전혀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일관된 세계정책을 만들어 나가느냐에 관해서였다면, 유럽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슈는 1989년에 일어난 사건의 결과로 새롭게 형성된 공간의 확대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대해서였다. 미국 사람들은 유럽에서의 냉전에 승리한 쪽은 미국이라고 계속 주장하지만, 1980년대 말에 발생한 사건의 실제 수혜자는 유럽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한때 분열되었던 대륙이 다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독일이 평화롭게 통일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가장 중요한 국제적 권리인 자결권을 얻어냈다. 마지막으로 유럽을 파멸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심각한 전쟁 위협은 없어졌다. 하나의 질서에서 또 다른 하나의 질서로 이행할 때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데, 특히 이제부터 자본주의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구유고 연방의 비참한 사태(1990~1999)가 잘 보여 주듯이, 일부 국가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붕괴는 무혈혁명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확대된 유럽이 여전히 기대해야 할 것이 많음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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