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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치론

[세계정치론] 냉전 - 갈등, 대결, 그리고 타협

by trulyforyou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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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

1953~1969년 : 갈등, 대결, 그리고 타협

1953년의 스탈린 사망은 소련 안팎에서 중대한 결과를 예고했다. 스탈린의 최종 후계자인 흐루시초프는 소련 사회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동유럽에서 개혁주의 세력들의 분출을 도왔다. 폴란드는 진압되었으나 헝가리의 사정은 소련의 패권을 위협했다. 1956년에 적군이 헝가리에 개입함으로써 부다페스트 거리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졌고, 소련 정부에 대해
국제적 비난이 쏟아졌다. 같은 시기에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공격했는데, 이는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점령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영국 정부의 행동은 국내외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사이의 특수관계’에 가장 심각한 균열을 야기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동맹국들이 취한 조치에 강력하게 반대했고, 영국은 미국의 경제 제재가 효과를 나타낼 때쯤 군사작전과 프랑스 · 이스라엘에 대해 지지를 포기했다. 이처럼 부다페스트에서 보여 준 소련의 행동에 대한 국제적 비난은 많은 사람들이 유럽 제국주의의 마지막 발작으로 여기는 수에즈 사건으로 약화되고 굴절되었다.

흐루시초프의 서방정책은 정치적 공존과 이데올로기적 대결의 추구를 병행하는 정책이었다. 소련의 민족 해방 운동 지원은 서방측에 세계적 차원의 공산주의 도전이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자결에 대한 미국의 공약은 자신들의 경제 · 정치적 이익뿐만 아니라 냉전적 시각에도 종속되었다. 냉전과 함께 만들어진 대규모 상설 정보기관은 적국의 의도와 능력을 평가하고 다른 국가의 내정에 은밀하게 개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61년의 베를린 위기와 1962년의 쿠바 위기는 냉전 동안 가장 위험한 순간들이었다. 두 위기 모두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 위험이 있었고, 1962년 10월에는 핵전쟁 가능성까지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세계가 아마겟돈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했는지, 정확히 왜 평화가 유지되었는지는 역사가들과 생존해 있는 당시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 커다란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1962년 사건 이후 더 안정된 공존과 경쟁의 시기가 뒤따랐다. 그런데도 핵 군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상황이 군비 경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치적, 관료적 압력이라는 내부적 요인 때문이었는지는 해석 여하에 달려 있다. 미국의 NATO 동맹국에 대한 공약은 '전술' 및 '전역' 단거리 핵미사일을 개발하고 배치할 필요성과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지구적 차원의 핵 문제는 그 밖의 국가들, 그러니까 영국(1952), 프랑스(1960), 중국(1964)이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고조되었다. 핵무기의 전파와 확산에 대한 염려가 증대됨에 따라 1968년에 핵확산금지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핵보유국들은 군비 경쟁을 중단할 것을 공약했고. 비핵보유국들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NPT의 여러 성공에도 불구하고 1990년쯤에 몇몇 국가들은 핵무기를 이미 개발했거나 개발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과 인종차별 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1969~1979년 : 데탕트의 부침

미국이 베트남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면서 소련一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 실제로 1969년 무렵에 중국과 소련은 영토 분쟁문제로 소규모 국경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도(또는 이 때문에) 이른바 미국과 소련 간 데탕트, 중국과 미국 간 화해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유럽의 데탕트는 독일 사민당 출신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에서 유래했으며, 결국 베를린의 독특한 지위와 동독의 주권을 인정하는 합의로 귀결되었다. 미소 데탕트는 핵 위기를 피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상호 인식과 무절제한 군비 경쟁을 피하기 위한 경제적, 군사적 동기에서 비롯됐다. 또한 미소 양국은 양자 관계의 손익계산에 따라 중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방에서 데탕트는 닉슨 대통령과 그의 참모이자 중국-미국 화해의 주역이었던 키신저의 정치적 지도력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소관계의 새로운 국면이 정치적 갈등의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양측 모두 저마다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가 있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상대방의 기대와 점차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양측은 우호적인 정권과 운동을 지지했지만, 적대 세력을 타도하려고 했다. 이 모두가 '제3세계' 에서 발생한 여러 정치적 격변과 맞물려 있었다. 초강대국들이 어떻게 우방을 통제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공약 때문에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는지의 문제는 어쩌면 위험한 대결이 될 뻔했던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미국과 소련이 뒤얽히게 되었을 때 두드러졌다.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초강대국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이집트-이스라엘 관계의 화해를 위한 정치적 여건이 마련되었다. 이집트가 충성할 대상을 소련에서 미국으로 바꿈으로써 외교 및 전략적 관계가 변환되었다. 이집트는 아랍 지역에서 단기간 고립되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두 전선에서 전멸전쟁을 치러야 하는 우려가 사라졌다. 그러나 계속되는 정치적 폭력과 테러리즘, 이스라엘과 다른 아랍 국가들 사이의 지속적인 적대감은 좀 더 항구적인 지역 안정을 기하는 데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10월에 미국은 소련 지도부가 비밀리에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해상 봉쇄를 단행했고, 미국의 핵 전력은 전례 없는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두 초강대국이 정면 대결 상태에 있었고, 대다수 역사가들은 이때가 냉전 기간 가운데 핵전쟁 위험이 가장 큰 시기였다고 본다. 소련의 문서와 정보 및 서방의 기록에 쓰여 있는 바에 따르면, 위기가 10월 26~28일 사이에 최고조에 이르면서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모두 정치적 양보를 포함한 외교적 해결을 갈망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압도적인 핵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두 지도자는 핵전쟁으로의 확대 위험은 세계적, 국가적, 개인적인 재앙이라고 인식했다. 그런데도 최근에 나타난 증거를 보면 연쇄적인 오인이나 하급자의 행동, 조직상의 실패 같은 요소들 때문에 우발적으로 핵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당시 정치 지도자나 역사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외교적 교착 상태는 케네디 대통령이 봉쇄를 선언한 지 6일 뒤에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보증에 대한 대가로 미사일을 철수함으로써 해소되었다. 또한 현재 드러난 바로는 케네디 대통령은 이에 상응해 NATO의 핵미사일을 유럽에서 제거하는 비밀 조치를 취했다. 많은 문헌들이 미소 간 대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많은 관심이 점차 쿠바 측에 쏟아졌다. 흐루시초프의 일차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모스크바와 하바나 정부 모두가 예견했던 미국의 쿠바 공격을 저지하는 일이었음이 분명해졌다. 카스트로의 역할 역시 면밀한 검토 대상이었다. 위기가 절정으로 치닫자 카스트로는 흐루시초프에게 전보를 쳤고, 흐루시초프는 이 전보를 카스트로가 미국에 대한 핵선제 공격을 옹호한다고 해석했다. 뒷날 카스트로는 미국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소련이 보낸 전술 핵무기를 사용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카스트로의 전보 때문에 흐루시초프는 케네디와의 타협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쿠바와 협의 없이 이를 행했다.

이 위기의 여파로 1963년에 체결된 부분핵실험금지조약 협상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대기 중에서의 핵무기 실험을 금지했다. 위기는 피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고, 소련은 베를린 문제와 관련하여 서방을 압박하는 시도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각자의 핵 군비 증강을 계속했다.